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하제의 누리

나에게로쓰는글

by 내일은비/신뽀리/가을비 2008. 7. 10. 13:18

본문

대학교 1,2학년 시절에 끄적여 놓은 잡설입니다.
다시 조금 고쳐서 올릴까 합니다.

※ 하제 = 내일이라는 뜻의 우리말 古語
누리 = 세상이라는 뜻의 우리말

================================================================

1. 집을 나서며

밤이 밤새도록 이리저리 물어 뜯다가 지쳐 새벽에 나를 놓아준다.
온통 헝클어진 머리속에 찬 물 한컵을 들이 붓는다. 창문을 열어 젖히면
이젠 차가워진 공기가 밤새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한꺼번에 밀려든다.
창가에 놓아둔 화분의 화초 이파리가 햇볕을 못받아 샛노랗게 시들어 있다.
아침 햇빛은 앞집 지붕위로 지나가고 축대 및 골방인 내 방에는 손바닥만한
빛도 들어오지 않는다.

골목에 나서면 대문앞에는 지저분한 쓰레기가 쓰레기주머니들 마다 차고
넘쳐 여기저기 뒹굴고 있고 벌써 떠돌이 개들이 다녀갔는지 개똥도 같이
섞여 있다.
큰 골목으로 들어서자 나를 본 개 한마리가 갑자기 짖어대기 시작한다.
이른 아침 적 출현의 위기감. 겁을 지레먹으면서도 온몸의 털을 세우고 짖는다.
늘씬한 개의 허리에 반들반들 빛나는 햇빛. 그래 짖어라, 너의 임무는 오직
주인을 위해 짖고 똥이나 갈기고 쓰레기나 뒤지고 암캐 뒤나 쫄랑거리며
따라다니는 것일테니까...

개는 행복한가. 행복한개는다리난간에매달려있다.몽둥이를들고노려보는김씨의입가에는개침이질질흐른다.버너위의찜통에물을끓이는박군의콧구멍이개처럼벌렁거린다.콧털몇가닥이삐죽이삐져나와있다.버너의열기에얼굴로개기름이번들거린다...아,개는갔습니다.너의먹음직한개는갔습니다.차마복날의액운을떨쳐버리지못하고다리밑찜통속의몇근의고기가되어이인간저인간의뱃속으로사라졌습니다.그날밤김씨집아줌마는개대신행복했습니다.박군은잠을못이루며뒤척여야했습니다.인간은모두개의행복까지행복했습니다.

골목끝에서 한 할머니가 물통을 지고 올라온다. 흰 플라스틱 물통은 그녀의 등에
걸린 배낭속에서 약수터물을 담고 찰랑거린다. 요 근래들어 몇 번 마주친 이후로
눈빛으로는 서로가 본 적이 있다는 의사표시를 내지만 한번도 인사한 적은 없다.
이 골목에 같이 산다는 것은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아니 이도시에서는 서로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나를 감추고 사는데 도움이 된다.

2. 미치광이 소묘

오래된 일기장을 찾아냈다. 그것은 내 오른쪽 위에서 네번째 갈비뼈 밑에서
녹슬고 있었다. 정신병상일지라고 누가 읽어 주었다. 누구는 수양록이라고도 읽어
주었다. 나는 소리쳤다. 이 미친 놈들아. 이건 그냥 내 녹슬어 가는 심장부스러기
일뿐이야. 고물장수도 코를 막고 지나갔다. 지독한 포르말린 냄새.

개미가 갈라진 벽틈에서 기어나와 정석수학1 재 52페이지 네번째줄에서 다섯번째
줄 세번째 숫자 사이로 기어 갔다. 그 순간 개미는 놀라서 머리를 들었다. 녹색옷을
입은 재수생이 강의실문을 쾅 열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칠판으로 다가가서 "개
똥같은 전진학원 재수생 새끼들아"라고 크게 분필로 써 놓고는 다시 쾅 문을 닫고
나갔다. 개미는 강의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러브까페에서 머리를 분홍색띠로 묶은 그녀가 말했다. 환경이 너를 구속하는 사슬이
아니라 더 나은 너를 위한 발판이 되게 할 수는 없니? 세상을 각지게 보고 맨날
자학만 하다보면 네 심장조차 각지고 말라터질거야. 난 피곤이 겹쳐 우울했다. 내
자취방에 고향선배가 여자친구를 데리고 와서 일주일째 머물고 있다. 난 친구집에서
혹은 독서실에서 자고 아침이면 남의 방처럼 자취방으로 돌아와서 선배의 그녀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나온다. 선배는 아랫목에서 벌건 윗몸을 드러내놓고 자고 있다.
난 그녀의 하얀 종아리를 보며 갑자기 성욕이 솟았다. 그렇게 살려면 차라리 죽어
버려. 나의 그녀가 이브처럼 속삭였다. 싫어 죽을려고 약방마다 돌아다니며 수면제
사모으러 다니기 귀찮아 차라리 술이나 처먹고 죽음처럼 잠이나 자자. 나의 그녀는
허공을 올려다 본다. 틀림없이 그녀는 나와 앉아 있으면서도 일전에 봤던 그 남자를
생각하고 있을꺼다. 나는 좌절한다. 질투의 눈을 감추기 위해 탁자위의 물기를 손으로
문지른다. 내 얼굴이 물위에 이지러진다.

담배연기가 어느 때 푸른색이고 어느 때 흰색인지 아니? 네가 어떻게 생각하던 난
너와 헤어질 수 없어. 담배나 한대 줘.

서울역앞에서그미친사람들이몰려와서악을쓰고있다.너이외의모든사람을저주하라.모든
사람이외의너만을사랑하라.나르시스여.이젠거울을깨버려라.세상은불속에녹아내리고
너는인적없는어느별어느외딴동굴속으로찾아드리니.머리를풀어헤친미치광이가나타나
너를반겨맞을거야.네눈이빠져부서지는흰이빨의거리에붉은강이흐르고청동의용이승천
하는때에.아인간들아너희들의후회는늘때늦게온다.

너도 생각해봐. 햇빛 안드는 골방에서 종일 라면하나 달랑 끓여먹고 담배만 뻑뻑
피워대면 그 연기가 내 말소된 독설을 재생해서 선명한 제록스 인화지에 그려 내는데
어떻게 연기가 파랄수 있니. 나 시간없어 이만 갈께. 혼자 거리에 나와서니 다시
머리가 아프고 어지럽다.

 

3. 어머니

안경을 벗어드니 흐릿하게 네온사인이 흐느적거린다. 그래, 저 불빛들이 나를 지켜주는 수호성 들이라 생각하자. 동네입구 포장마차를 찾았다. 술병에 숙녀의 바람에 떨어진 별이 쌓인다. 내 주머니 속의 목마방울. 쩔렁거리며 밤하늘로 솟는다.

어머니 이젠 지친 몸을 당신 곁에 편히 두고 싶어요. 바라다보이는 산야의 나무와 풀과 꽃들은
무성히 단풍드는데. 내 앞을 스쳐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들은 바삐 지나가고. 저의 시계만 멈추었어요. 햇살 내리는 강가의 돌멩이를 뒤져서 모래무지,다슬기,송사리 따위를 잡고 예쁜 색깔의 조약돌을 주머니에 넣어 돌아오는 길에 미류나무를 스쳐 지난 바람이 내 짧은 머릿결을 간지럽히던 그런 때가 어머니, 저에게도 있었나요. 전 어머니 곁을 일찍 떠나왔어요. 세상은 어린 저를 유혹했고 그리고 내팽개 쳤어요. 아는 바를 실천 못하고 주눅든 모습으로 나약하게 이렇게 남겨졌어요. 돈에 권력에 사회에 기성이 무섭기만 하네요. 어머니. 눈 감는다고 다 가려지지 않는 세상의 혼탁함. 낙엽이 지고 곧 눈이 내릴꺼예요. 지하철역 모퉁이에서 라면박스에 강아지를 팔고. 어머니 보내주신 고구마에 빗물이 들어 노오란 싹이 돋았는데. 전 이 도시 어느 틈에도 끼지 못하고 뿌리 못내리는 이방인인가 봐요.


4. 벽의 패러독스

겨울의 얼마남지 않은 찢어진 남루한 거지의 옷자락같은 바람이 도시의 술집골목을 지나갔다. 여전히 그녀의 얼굴은 희다. 술에도 쉽게 붉어지지 않는다. 입술은 빨갛다. 긴 손가락 사이에서 타오르는 장미담배. 난 이류대학 분교생인데...그녀의 일그러진 얼굴따라 촛불이 흔들린다. 촛농이 떨어진다.

자취방을 정문에서 학교후문으로 옮겼다.

어머니 저는 오늘도 어머니가 보내주신 등록금으로 대학노트를 옆에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갑니다. 윤동주. 말소리마저도 흐물거리는 늙은 교양영어 교수는 정년퇴직이 내년이다. 보증금 10만원에 월세 3만원짜리 달세방은 재래식 연탄 아궁이에 늘상 습기가 차서 불이 잘 안붙고 연탄불이 한밤중에 꺼지기 일쑤였고 이북 사투리를 쓰는 주인 할머니는 일흔의 나이에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잔소리를 늘어 놓았다. 물 아껴. 전기불 오래 켜놓치마. 그기다가 화장실도 자주가면 눈치를 주었다. 큰 단지를 땅에 묻어두고 그 위에 널판지 몇개 걸쳐놓고는 그것도 똥통이라고...난 큰 볼일은 학교 화장실에 가서 보았다. 도대체가 자취집 화장실은 오래 앉아 있으면 엉덩이가 시리고 발이 저려서 볼일도 제대로 못보고 물튈까 노심초사 아래만 바라보고 있어야 했으니...학교 화장실 벽에는 낙서도 많다. 학우여 총단결하여 독재를 박살내자...
친구 누나는 잠옷바람으로 나를 맞아 주었다...오늘도 실패다 망할놈의 변비...인간은 무엇인가...더러움 위에쌓이는 배설의 형이상학...이런 낙서들 위에 덧씌워진 담배자국...

삼월에도 봄기운은 전혀 느낄 수 없다. 고향의 삼월과는 너무도 다른 도시의 삼월. 바람은 칼날처럼 창문 틈으로 스며들어 얼굴에 싸늘히 부딪힌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