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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오늘 ... 1994년작

나에게로쓰는글

by 내일은비/신뽀리/가을비 2008. 7. 10.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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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에 사보에 연재했던 소설입니다.



그 남자의 오늘


1. 그 남자의 꿈


그는 꿈에서 깨어났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길위를 가고 있었는데 흰 천으로 얼굴에서 발끝까지 칭칭 휘감은 사람들의 무리가 한없이 그의 반대편에서 마치 날아오듯 스쳐 지나갔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않고. 그는 그들과 같은 쪽으로 가보려 애썼지만 이상하게 몸이 따라가지 않았고 그들과는 반대쪽으로만 걸음이 움직였다. 길 한가운데 큰 고목나무가 나타났고 그는 그 앞에서 잠을 깨었다.

오후내내 그는 비디오만 보았다.

아담이 눈뜰때 지하열차가 막 도착하고 있었다. 지하철은 그가 서있는 역에서는 서지않고 그냥 지나쳐 지나갔다. 열차위쪽에 ""지옥행""이라는 표식을 달고. 아-.저 세상으로 가고 싶다.
홍차의 붉은 꿈. 화면에 비치는 두 남녀는 이제 스무살 그들의 우유빛 살결이 보름달처럼 빛난다. 그는 리모콘의 소리키움 버튼을 그 여자의 허리인양 문지르고 문지르고 했다. 짐 모리슨은 속옷을 벗었고 어머니 .... 밥이나 굶지 않는지 원.... 넥타이가 조여드는듯 그는 목을 한번 쓰다듬었다. 30대에는 무엇을 생각해야하나, 가족들의 건강,급여통장의 잔고,부금통장의 적립금. 화면 속의 그여자의 몸이 프로펠라처럼 돌아간다. 18MM 스테인레스 파이프를 그녀의 어두운 절망에 묻고 그는 야수처럼 울었다. 내 인생의 이십대는 3류극장 화면처럼 낡고 비가 오고 흐릿했던 것 같아. 제기랄. 비디오 테잎을 감아놓고 그는 빨레를 했다. 두스푼짜리 세제가 세탁기속에서 소용돌이치며 그의 누런 속옷을 끌어 당긴다. 아담의 첫 빨레는 무엇이었나. 감람나무 이파리 ?. 그는 바보처럼 혼자 희죽 웃었다.

아담 너의 눈동자는 썩어 떨어져 거미가 너의 파인 눈자국에 줄을 치고 이브 너의 잘록한 허리는 갈비뼈에 말라붙어 찢어지는데 인간들아 다들 어디로 갔느냐. 아무도 사과나무 뒤에서 대답하지 않았다. 아 하늘아래 땅위에 오직 나혼자 구만년 동안을 떠돌았구나. 하늘을 향해 불쑥 솟아오른 거대한 첨탑. 사이보그네틱스. 로봇트 태권브이. 태양아들 우리들의 차돌이. 세탁기가 몇분간 돌아가더니 울컥 세제물을 토해 내었다. 그는 재빨리 양동이에 그 물을 받았다.
다시 세탁기로 수돗물이 들어 가고 돌아가기 시작하자 그는 받아놓은 물에 걸레를 담아 두어번 쥐어 짠 다음 방으로 들어갔다. 온갖 잡동사니 물건들과 책과 옷가지,이불등으로 가뜩이나 좁은 방은 더 좁아 보인다. 한쪽으로 대충 그것들을 치워놓은 다음 바닥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걸레는 금새 더러워졌다. 그는 두세번 걸레를 빨아 짠 다음 방을 닦았다. 그동안 다 돌아간 세탁기는 임무가 끝났다고 삑삑 울어대었다. 세탁기 뚜껑을 열고 옷가지를 꺼내어 현관문을 열고 허공에 몇 번 털어낸 다음 방안에 걸려있는 줄에다가 대충대충 척척 걸어 놓았다. 방안은 더 답답해졌다. 그는 텔레비젼 스위치를 넣고나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80리터짜리 냉장고 속에는 달걀,포장김치,맛살,캔등이 그의 선택을 기다리며 들어서 있다. 그는 맥주캔과 맛살봉지를 꺼내어 방바닥 신문지위에 놓고 벽에 적당히 기댄다음 텔레비젼을 보며 맥주를 마셨다. 찬 술은 청소하느라 더워진 몸을 기분좋게 식혔다. 바깥은 점점 어두워지고 바람이 부는지 창문이 흔들거린다. 텔레비젼이 재미없어서 그는 텔레비젼은 소리는 죽이고 화면만 켜놓은채 CD-카셋트에 손에 잡히는 데로 집은 CD판을 넣었다.
기기에 불이 켜지고 음악이 흘러 나온다. 이미 다 비어버린 빈 캔을 손으로 쭈그러뜨렸다. 배가 부르고 소변이 좀 마려웠지만 그는 그대로 기댄채로 있었다. ""그녀가 좋아하던 저달이 몰락하고 있네"" 무슨 노래가사가 저렇냐. 참 획기적이구만. 21세기 지향의 포스터모던인가. 그는 생각한다.
전화기의 온-훅크 다이얼을 손으로 한번 눌러 보았다. 삐-소리가 섬짓하게 컸다. 전화기 고장은 아닌데 다들 재미가 좋나보구만. 전화 한통 없고. 제기랄. 청춘이여. 어젯밤에도 밤늦게 비디오를 보고 잠이 안와서 이미 헤어진 그녀에게 전화를 오랫만에 해 보았는데, ""지금거신 전화는 결번이오니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기계소리만 울려 나왔다. 그녀도 이젠 이사를 갔나보군. 모든 것이 정말로 끝났구나. 그녀와의 좋았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가슴을 지나간다. 이젠 전화걸어보고 싶은 여자도 없어졌군. CD는 벌써 5번째 곡을 연주하고 있다. 항상 이렇게 주말 휴일이 지나가는구나. 아니지 항상은 아니었지. 적어도 그녀가 그의 곁에 있는 동안은 주말이나 휴일이나 일과후에는 항상 약속이 있어서 집에서 지내는 적이 거의 없었는데. 있을때는 귀찮고 없으면 아쉽다더니.

그는 몸을 일으켜 방가운데 섰다. 그리고 팔을 천정으로 뻗어 기지개를 켰다. 입이 째져라 하품도 하고는 창문을 드르륵 열어 제쳤다. 초봄 아직 쌀쌀한 바람이 방안으로 휭 불어 왔다. 앞집과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담장 너머로 앞집의 부엌이 들여다 보인다.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불빛만 가득하다.
담장 가까이에 힘겨운듯 줄기 몇 개 담장에 기댄 목련나무 가지의 꽃봉오리가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 온다. 마음이 답답하고 덮다. 예전의 시골학교 교정에 가득했던 목련나무를 떠올려 보면 저 도시의 공해에 찌든 비틀어진 나무가지가 자기 자신의 모습인듯이 여겨져서 짜증이 솟았다. 그는 남방을 벗고 거울앞에 섰다. 흰 메리야스 내의에 감추어진 초라한 자신의 몰골, 그는 거울을 보며 권투하는 시늉으로 팔을 쭉 뻗어 보았다. 머리도 좌우로 흔들어 보고 권투선수처럼 스텝도 밟아 보았다. 영 기분이 안난다. 개켜놓은 이불에 기대어 벽으로 물구나무를 섰다. 머리가 빙빙 어지럽다.

남방위에 잠바를 걸쳐입고 방안에 불은 켜 놓은채로 방문을 잠근 뒤 그는 골목길로 나섰다. 동네 슈퍼마켓에 가서 군것질거리라도 사볼까 했다. 골목길 양편으로 대문앞 마다 쓰레기들이 가득하다.
검정 비닐에 담겨져 있는 것들과 종이 박스에 담겨져 있는 것들이 깨어진 쓰레기통 옆에 지저분하게 쌓여 있다. 얼룩 고양이 한마리가 그 틈에서 갑자기 뛰쳐 나오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슈퍼마켓에는 언제나처럼 손님들이 많았다. 좁은 골목에 비슷한 크기의 슈퍼만 대여섯개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이집만 장사가 잘되는 것은 물건 얼마치 사면 얼마 안되나마 사은품을 주기 때문이다. 사람이란게 공짜라면 다들 좋아하니까. 그래서인지 장사가 잘되다보니 요즘와서는 손님대하는 태도가 영 맘에 안들때가 많다. 반말찌꺼리를 툭툭 내뱉는 주인남자도 남자이지만 그의 딸인지 뚱뚱하고 나이들어 보이는 여자가 계산대에 서 있으면 그는 그집에 가기가 싫었다. 그녀의 털이 숭숭난 손가락이 금전등록기의 자판을 두들기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그가 산 물건들을 내팽개치듯 비닐봉지안에 던져 넣을때면 그도 욕가지가 목구멍에 잔뜩걸리곤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물건사러 오는 이 동네의 젊은 남자들이 모두 자기 보러 오는양 착각하고 있는지 항상 의기양양 기가 살아있었고 그는 그것이 늘 마땅찮았다. 오늘도 그녀가 계산대에서 껌을 짝짝씹고 있는것을 보았지만 그가 살려는 물건이 이집밖에 없어서 그는 시선을 내리깔고 안으로 들어섰다.'누가 너 데리고 살런지 끔찍하다 야'
비닐봉지를 어깨위에 둘러메고 오다가 비디오 가게에 들렀다. 인사를 건네는 주인 아줌마 얼굴이 오늘따라 환하다.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그녀는 비록 장삿속이겠지만 항상 웃는 얼굴로 몇마디의 인사를 건넸고 또 비디오 빌리는 값도 깍아줬으며 늦게 돌려주더라도 아무 재촉이 없었다. '햐 저 슈퍼마켓의 마녀와 꺼꾸로라면 내가 어떻게 데이트신청이라도 하련마는' 그는 가지고 온 테이프를 돌려주고 다시 몇개의 테이프를 빌려 나왔다.

하늘에 달빛이 가득하다. 달빛에 기대어 맥주캔을 몇개째 비우던 그는 내일 인사발령나는 날 이라는 기억이 나자 얼굴이 다시 우울해졌다. 작년 인사발령때 입사동기중 유일하게 그 혼자만 진급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그 이유를 잘안다. 별로 좋지않은 성적으로 지방의 이름없는 대학을 나온 그는 다른 동기들에 비해 내세울게 하나도 없었고 천성적인 다혈질로 늘 상급자와 다퉜기 때문에 진작 승진에서 떨어질 줄은 알았지만 막상 발표가 나던날은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서 생각치 않으려 해도 눈물이 쏟아질것 같아서 퇴근시간이 되자마자 붙잡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나와서 그대로 잘 가던 술집으로 가서는 마구 죽어라 술만 퍼 마시고는 뻗어 버렸었다. 정신이 든것은 다음날 새벽녘이었는데 그의 옆에는 그 술집 여자얘가 누워 있는게 아닌가. 어둠속에 어슴푸레 눈에 들어오는 옷장이랑 화장대등으로 미루어 보건데 아마도 그녀의 자취방쯤 되나보다. 평소 자주 드나들어서 그를 알아보기는 해도 쓸데없는 농담 몇마디외에는 개인적으로 얘기나눈 적도 없는 여자였는데. 그는 갑자기 목이 타듯이 말랐다. 주전자채로 식은 보리차를 벌컥벌컥 들이켰고 그 소리에 그 얘도 잠이 깼다. 그 날 밤의 그녀의 낡은 속옷과 땀내나는 얼굴과 흰자위가 많던 눈동자가 생각날때마다 그는 죽고 싶었다.


'아저씨 나 내일이면 고향 내려가요. 이생활 청산하고 화장품가게 하나 차렸거던요. 부담갖지 마시고 시간나면 한번 놀러 오세요.'아직 그녀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전에 생생하다. 이번에도 진급 못하면 내일 밤에는 또 어느 여자얘랑 누워 있을래나. 나도 어느새 승진,진급 이따위나 신경쓰고 그기에 죽을똥 살똥 울고 웃는 신세가 되어버렸지. 다들 이러고 사나 보다. 이젠 더이상 초라해지지 말아야 할텐데. 그는 라디오 노래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꿈이나마 좋은 꿈 꾸어지기를 바라며.

오늘도 술취한 걸음으로 버스에 올랐지.
밤 늦은 시간의 텅빈 자리들은
낮 동안의 사람들의 흔적으로 구겨지고
낮은 불빛에 내 얼굴 비치는 차창
내 얼굴보다 선명히 겹쳐지는 건
누구인지 몰라
서울의 하늘은 가슴의 슬픔보다 어두운데
답답한 한숨은 안개보다 깊어
저만치 정류장에 손흔드는 사람
봄꽃들은 언덕마다 가득 피어나도
하루를 겨우살아 꿈꾸어지지 않는 매일

지하보도 계단에 버려진 휴지처럼
내 영혼도 구겨서 누가 버렸는지 몰라
여기 이 땅위에
버스는 달지듯 서고
어디로 가는지 이제는 밤하늘 그려지는 얼굴은
술취한 내 얼굴인지도 몰라.


그 남자의 바다

바다는 여전히 그만치의 거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곁에 왔지만 바다에 쉽게 젖어들지 못하고 그리움의 바다는 안개비 속에 고요히 침묵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 서글픈 인간아 나는 바다로 너는 너로 언제까지 그렇게 인환의 거리를 질주하며 살려냐. 그러나 바다도 죽어가고 있었다.
건너편 공장에서 밤낮없이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그대로 바다속으로도 시커먼 배설을 낳고 있어 바다는 깊은 신음을 안으로 안으로 잦아들면서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곧 인간들의 비대해진 벌건 몸뚱아리들로 버글댈 백사장에도 작년 여름의 버려진 쓰레기들이 여전히 뒹굴고 있어 이미 바다의 고통의 그림자는 상륙하고 있었다.

그는 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위의 여관 현관문 앞에서 나즈막한 한숨을 쉬었다. 갑작스런 지방발령으로 제대로 짐도 못꾸리고 부랴부랴 새벽같이 이 도시로 내려왔지만 막막했다. 물론 여기에도 그가 다니는 회사의 지방 사무실이 있지만 간판만 걸어놓구 늙수구레한 이 지방 출신 고참소장한명과 철없이 생글거리기만 하는 잘하는 여직원이 전부였고 누구나 이도시로의 발령은 곧 사직으로 연결시켜 생각되었기에 그도 처음에는 그만둘까하는 생각을 했지만 웬지 억울한 감정과 당장 살길이 없다는 비참한 처지로 일단 내려나 가보자하고 왔건만 어두운 마음의 앙금은 사라지지 않았다.

별반 할일도 없이 시간만 보내는 소장은 인사를 끝내자 줄곧 자기 신세타령만 늘어 놓고는 그가 무슨일을 해야하는지 물어볼 틈두 주지않고 누군가 만나야 한다며 휑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제 겨우 앳된 티가 막가신 듯이 보이는 키가작고 얼굴에 주근깨가 드문드문 박혀있는 여직원은 심심하던 차에 잘 만났다는 듯이 그 앞에 앉아서 자기 얼굴을 그의 얼굴에 닿을듯이 들이밀고는 온갖 그에 대한 호구조사를 해대더니 소장의 성격이며 이도시에는 자기만 거치면 모르는 사람이 없고 모르는 장소가 없다는 얘기들로 조잘조잘 잘도 수다를 떨었다. 그는 그얘의 뽀오얀 스타킹도 신지않은 종아리를 보면서 갑자기 서러움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저녁 어둠이 밀리는 바닷가로 걸음을 옮겼다.회사에 대한 불만보다도 이제는 갑자기 너무나 적막스럽게 다가드는 이 도시의 어두운 해변이 그의 영혼을 고독으로 갈갈이 찢어버릴 것만 같아서 막 모래사장이 시작되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바다위에 두어척 떠있는 작은 고깃배들을 보면서 담배를 빼어 물었다. 바람이 끈끈하고 후텁지근하게 그를 스치고 지나간다. 어디나 내게는 타향이지 머. 서울이나 여기나...그는 스스로를 위안시켰다. 바다여 어둠에 묻혀드는 늙은 바다여. 해지고 달뜨는 한밤 머리를 풀어헤친 광녀가 이 백사장을 뛰어 달리며 배 기적소리보다 더 깊은 소리로 바다 너를 저주하겠지.


작년 늦가을 혼자 출장갔던 동해의 어느 바닷가가 떠올랐다. 그가 출장간 곳에서 시간이 많이 남아서 시외버스를 타고 무작정 북쪽으로 더 올라가서 아무곳이나 내렸던 그곳...낡은 고깃배들은 부두에 묶여 있고 바다에는 갈매기 몇마리뿐...바닷가에도 길거리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아무데고 없어서 그 고즈넉하고 텅빈 공간이 그를 마치 정지된 시간처럼 맞아주었다.
목이 말라 음료수를 사려고 들른 조그만 해수욕장 입구의 가게에는 긴머리의 해맑은 눈동자의 처녀가 그를 오랫만에 손님을 만난다는듯이 반겨 맞았다. 그는 달랑 음료수 하나만 사기가 미안해서 두개를 산 다음 그 처녀에게 하나를 건네주고 바닷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를 그 처녀는 가게 낡은 유리문 사이로 한없이 바라보았다. 해수욕장 옆 부둣가에는 하얀 등대가 서 있다.
그는 그 등대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바다는 눈부시게 햇빛에 파랗게 빛났고 등대도 갈매기도 백사장도 하얗게 하얗게 빛났다. 파란 하늘로 시선을 옮기며 그는 문득 너무 외로워서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살아왔던 다 지나가버린 지난 여름의 흔적보다도 못한 생인데 여기 발 하나만 옮겨 바다에 뛰어든들 누가 그를 기억해주고 애닯아 하리...
그는 그래도 저기 가게의 처녀는 나를 조금은 기억해줄지도 몰라...하면서 피식 웃음을 지었다. 등대에서 해수욕장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여름 한철에만 이용하는 해수욕장 주변의 가게들은 텅비어 있고 깨진 병조각들과 과자봉지들...낡은 물놀이 장난감들이 그 가게들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해안선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뛰어나온 어린아이 세명이 까르르 웃으며 공을 던지고 차고...바닷가를 마구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도 갑자시 서류 봉튜와 겉옷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그 아이들에게로 달려갔다. 그아이들을 내쳐 지나가 마구 달렸다. 드디어 시간도 공간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늘엔 구름이 흐르고 갈매기가 날고 바다는 그를 따라 파도치고 아이들 웃음소리 수면위에 부딪혀 돌아오며...멀리 가게의 처녀는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흰 이빨을 보이며 들리지 않게 역시 미소를 흘린다.

그 동해의 바다는 살아있었건만 여기는 움직이는 존재들 사이로 바다는 나날이 죽어가는듯 느껴지는걸까...인간이 스쳐간 모든것에는 아무것도 남지않으리...핵폭발이 지나간 사막처럼...




늙은 해송이 겨우 몇개 남지않은 잔가지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길옆
포장마차 불빛이 그를 잡아끌었다. 포장을 제치고 들어서니 달착지근한
안주굽는 냄새속에 몇몇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석쇠의
안주를 손님들앞에 옮기던 중년의 뚱뚱한 아주머니가 그를 반긴다.
그는 국수와 소주 한병과 꼼장어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포장장막 틈으로
밖을 내다 보았다. 모래사장 위를 선남선녀들이 밤데이트를 즐기며
걸어가고 있는 모습들이 보이고 누군가 혼자 앉아서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그림같다. 어두워 불빛 두어개 밖에 보이지 않는 수평선인데...

몇가닥의 면발이 힘없이 끊어져 다시 그릇속으로 떨어졌다. 그는 또 그모양이
자기인듯이 여겨져서 가벼운 하숨을 내뱉었다. 찬 소주는 쓰디쓴 기억을
혓바닥에 남기고 식도를 타고 흘러가 고추가루 둥둥뜬 국수국물과 섞였다.
꼼장어 한토막을 앞니로 가볍게 물어보았다. 한순간 그 토막이 움직인듯한
착각에 흠칫 몸을 떨었다. 옆자리에 앉은 허름한 옷차림의 중년의 사내는
그 옆에 앉은 짙은 화장의 젊은 여자와 아까붜 수작을 부리고 있다. 그는
계산을 치르고 일어섰다. 저녁대신 먹은 국수랑 소주랑 꼼장어들로 인해
뱃속이 불편했지만 심호흡 한번 크게하고 담배를 다시 꺼내 물었다.

치마자락을 모으고 무릎을 두팔로 감싸안은 채 수평선을 응시하던 그림같던
"그 물체가 그를 돌아 보았다, ""아니...?""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가 밤공기에"
갈라지며 그의 귓전에 떨려온다.

낮에 정신없이 수다떨던 사무실의 그 주근깨 여직원이었다. 사복차림의 그녀는
"낮과 달리 밤분위기 때문인지 옷차림때문인지 몰라도 많이 달라보였다. ""여기"
"자주 나오는 모양이죠?"" ""아뇨 가끔씩 기분이 울적하거나 생각들이 뒤엉켜 있"
"을때 한번씩 나와보곤 해요"" ""젊은 처녀가 퇴근후 데이트나 즐기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다니고 하지 혼자 청승맞게 나왔어요?"" 그녀는 잠시 조용하다."

"전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꿈이 많아요. 그런데 이 좁고 한적한 도시에 갇혀"
"나날이 저 바다처럼 늙고 죽어가는 것 같아서 견딜수가 없어요."" 그는 아무말"
없이 그녀옆에 앉았다. 그녀에게서 화장하지 않은 그 모습 그대로의 향기가
밤바다 파도소리와 섞여서 그의 빈 마음으로 흘러들어온다.
'나처럼 꿈잃은 사람들도 이 도시로 흘러들어 오는데...'

'그래도 아직 밤바다 풍경은 괜찮아요. 바다랑 땅이 한가지 색깔로 배경을 이루면
쪽 건너편 가로등 불빛이나 저 앞 정박해 있는 배에 걸린 등불이나 하늘의 별빛
"들은 사라지는 내꿈처럼 빛나거던요."" 그녀의 목소리는 나즈막하고 물기에 젖어"
있다.
"""왜 더 큰도시 나가면 되지 안나갔어요?"""
"""제가 집안의 맏딸이거던요. 아버지는 고깃배타고 나가시면 몇주일씩 걸려서"
"돌아오시고, 어머니는 새벽같이 나가셔서 저기 해변시자에서 고기파시고 밤"
늦어야 들어오셔요. 그래서 제가 동생들 밥먹이고 학교보내고 다해야 하거던요.
"""오늘은 동생들 저녁 굶겠어요. 누나가 여기 나와 있으니"""
"벌써 퇴근해서 저녁 해놓고 나왔어요, 참, 낮에 제가 너무 까불어서 보기 싫어"
"셨죠?"""
"""아니 별로요..."""
"""저도 참 오랫만에 외부사람 대하니까 반갑기도 하고 그동안 제가 대화에 굶주"
"렸었나봐요."""

바다가 두사람의 곧고을 그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히나보다.

며칠이 흘렀다. 그녀는 그를 친오빠처럼 따랐다. 그도 예전에 있었던 다른 사람
들과 달리 그녀에게 잘 대해주었다. 처음 그녀에 대한 이미지는 애틋한 정으로
나날이 쌓여가는듯 느껴졌다. 그녀는 여고를 졸업한지 얼마되지 않은 풋풋함과
예의 명랑함과 애교로 그의 고독감을 잊게 만들었다.
비오는날 해변에서 비에젖는 바다를 같이 바라보며 슬픈 옛노래도 불러보고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솔숲 언덕에 앉아 서로의 가슴에 남아있는 희망을
이야기 하기도 했다.
또 며칠이 흘렀다. 그는 중요한 거래처 접대약속이 있어서 시내 고급 술집으로
퇴근하자마자 나가게 되었다. 쉽게 일이 풀려 기분이 좋아진 그는 상대방
사람과 헤어지자 모처름의 객고를 풀고픈 욕망에 그 도시 시외버스 정류장
뒤에 있는 텍사스촌을 찾았다. 썩은 물은 바다밑으로 흐르고 그는 그밤 물위에
죽어 떠오른 인어의 꿈을 꾸었다. 숙취에 다음날 오후 늦게 출근한 그를
보자마자 그녀가 바깥으로 불러냈다.
어제 퇴근해서 일끝내시구 어디갔었어요? 그는 순간 가슴이 뜨끔했으나
일끝나구 숙소에 들어가 잤지 어디가.. 그녀는 말없이 흘겨보더니 갑자기
돌아서서 울기 시작하는것이 아닌가. 그는 적잖이 당황했다.

"왜그래 고정해. ""전 오빠가 그런데 드나드는 사람인지 몰랐어요. 그런 더러운"
"곳에는 왜 가신거예요?"" 그는 아무말도 할수가 없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그날 저녁 두사람은 바닷가 까페에 마주 앉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후 조용히
그러나 울먹이는 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그렇게 여자가 필요하시면 저를 가지세요.

그녀는 태초의 바다. 그는 노저어 갔다. 바다는 꿈틀대고 끓어올랐다. 그녀의
땀내젖은 신음소리에 이어 조그맣고 한적한 도시의 밤이 숨죽여 울었다.


그 남자의 눈물.....♧

고풍스런 거리에 그 혼자 서있다. 대리석이 깔린 거리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 길 좌우에는 높다란 건물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후끈한 더운 바람이
"저 먼 지평선에서 그에게 불어온다,. 하늘은 푸르스름한 안개로 덮여있고"
햇빛인지 불빛인지 안개사이로 붉은 빛줄기가 몇갈래 뻗어 비친다. 너무나
조용한 적막이다. 그는 이 적막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가 언제부터
그기에 서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는 지금 서 있는 거리에 영원히 서 있을 뿐이다. 시간이 멈춰져 있는
지도 모른다.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 속의 그는 고통으로
울부짖었다. 비는 물줄기가 아니었다. 황산인지 염산인지 그의 살갗에
닿자마자 허연 연기를 뿜어내며 살을 녹여냈다. 그는 비를 피하여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벌써 발조차 길바닥에
녹아 붙은 모양이다.
금세 그의 머리카락은 몇가닥 남지않고 다 타버리고 전신의 살갗은 벗겨
지고 타서 검붉은 핏물과 범벅이 되어 흉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온천지가
찢어져라 고통의 울부짖음을 토해냈다. 으...아..아아악....해골만 남은
"얼굴에 겨우 붙어있는 살가죽 몇조각과 핏줄로 쌓인 눈알, 이빨만 남은"
턱조각을 움직이며 그는 단말마의 비명만 토해냈다. 혓바닥마저 그 빗줄기에
"금세 너덜너덜 녹아내렸다.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고통이, 어서 그의 "
"목숨을 끊어주기만을 기다릴뿐이었다. 비가 그쳤다, 살 몇조각과 뼈만 남은 "

그의 육신은 거리의 끝에 여전히 붙어있다.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반대편 거리에서 온통 전신을 검은 철판으로 뒤집어
쓴 중세의 기사같은 한무리가 그에게로 곧장 달려왔다. 검은 투구속에 흰
눈동자만 빛난다. 차갑게. 그들은 손에 삼지창같은 쇠꼬챙이로 녹아붙은
그의 육신을 찔러 들어올리고서는 다시 달려가기 시작했다.
쇠꼬챙이에 들어 올려진 그의 육신은 검붉은 핏줄기를 길바닥에 떨어뜨리며
말 꽁무니에 매달려 덜렁거렸다. 도시는 끝나고 길은 사막으로 접어들었다.
말을 탄 무리들은 어느 높은 모래언덕위에서 멈춰섰다. 그 언덕위에는 하늘
높이 흰 십자가가 꽂혀 있다. 그들은 그를 십자가에 아무렇게나 매달고
다시 먼지만 남기고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지평선에서 걺붉은 버섯구름이 태양보다
밝은 빛과 함께 피어 올랐다. 눈꺼풀이 녹아 감겨지지 않는 눈으로 그는 굵은
피눈물 덩어리를 땅위로 흘렸다. 하늘에서 암석덩어리들이 떨어지기 시작
했다. 이제 정말 모든것이 끝이구나...엘리엘리레마사막다니.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지하철 안이었다. 몇시인지 어디인지도
모르겠다. 검은 터널속으로 달려가는 지하철안에서 그는 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도 처참한 환영이 아직도 그의 눈가에 어른거리고 고통이 여전히
느껴지는듯 팔이 저려온다. 아 이 피곤한 육신 편히 쉴 곳 하나 있다면...
그는 맞은편 자리에 앉아 역시 졸고 있는 미니스커트의 흰 허벅지를 훔쳐
보면서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욕망의 객체로 전락해버리는 허망함과
초라함의 극치...
그 모든 꿈들은 무엇이었지. 우주에서 미미한 존재하나로 떨어지는 아득한
추락...절망과 멸망의 사이에 깊은 블랙홀에 그는 빠져드는 듯 다시 눈을
감았다.

그는 울고 있었다. 끝없이 달려가는 지하철 낡은 자리에 앉아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울고 있었다. 다시 들려오는 말발굽소리...


☞.........졸작이었습니다....내일은 悲가 아니라 希望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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