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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 쓴 소설 - 우리가 따뜻했던 날

나에게로쓰는글

by 내일은비/신뽀리/가을비 2008. 7. 9.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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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초기 사보에 연재했던 창작 소설입니다.....

유치하고 졸작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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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 종아리 두개


가난때문에 청춘은 빛나고 추억때문에 인생은 따뜻하지....

가난때문에 인생은 빛나고 추억때문에 청춘은 따뜻하지....

청춘때문에 가난은 빛나고 인생때문에 추억은 따뜻하지....

추억때문에 청춘은 빛나고 가난때문에 인생은 따뜻하지....

추억때문에 인생은 빛나고 가난때문에 청춘은 따뜻하지....

청춘때문에 인생은 빛나고 추억때문에 가난은 따뜻하지....

인생때문에 청춘은 빛나고 가난때문에 추억은 따뜻하지....


너때문에 내삶은 시들었고 나때문에 네삶은 따뜻했을까

삶때문에 나는 시들었고 삶때문에 너는 따뜻했을까



K와 H는 오늘로 기말고사 시험이 끝났다.

K와 H는 종로 3가 피가디리극장앞에서 오후 3시쯤 만났다.

H가 10분쯤 먼저와서 K를 기다리고 있었다.

"덥지?" K가 H에게 손부채를 부쳐 주었다.

"시험은 잘 쳤니?" 그들은 이런저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누며

파고다공원 뒤로 갔다.

그 극장은 어느때 가도 표가 있었다.

얼마전만해도 동성연애자들이 즐겨찾는 극장이라고 일반인들은

잘 안오던 곳이었는데

요즘은 이놈 저놈 섞여서 분간이 안간다.

모두다 제 얼굴이 아닌 듯이 K는 생각되었다.

영화제목은 "전선위의 참새"였다.

앞 상영분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K와 H는 낡은 휴게실

긴의자에 앉아 있었다.

H가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두개 꺼내왔다.

캔을 다 마실때 쯤 영화가 끝나고 얼마의 사람들이 그렇고

그런 표정들로 쏟아져 나온다.

K와 H는 입구로 들어가서 영사기 우편 기둥옆자리에 앉았다.

K는 "화장실 좀 갔다올께" 하면서 밖으로 나왔다.

화면에는 막간에 뮤직비디오를 틀어 주고 있었는데 입이 화면

만큼이나 큰 흑인여자랑 흑인남자가 나와서 온통 흔들어대고 있다.


화장실벽에는 붉고 큰 가지그림이 붙어 있다.

가지하나 때문에 삼천리는 대만원.

포스타 옆에는 일회용 휴지 판매기가 벽에 붙어 있다.

미지근한 수돗물에 손을 씻으며 K는 창밖을 내다본다.

지저분한 나즈막한 건물들이 줄줄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검붉다.

H는 의자뒤로 몸을 기대고 눈을 감고 있다.

K가 자리에 앉자 H가 화장실로 간다.

조금 있다가 H가 얼굴을 찡그리며 왔다.

"왜 그래?" "물이 안나와"


문화영화가 끝나고 다음프로 예고편을 하는 동안 K는

극장안을 휘 둘러 보았다.

어둠속에 쌍으로 온 사람들은 벌써 서로서로 어깨와

얼굴을 기대고 있어서 머리통이 마치 하나로 보인다.

자리는 반에 반정도 차있다.

잠시 함지박을 안고 돌아다니던 장사꾼 아줌마는

저쪽 귀퉁이 자리에 앉아 하품을 하고 있다.

H가 머리를 기대 온다. H의 머리에서는 샴푸냄새와

땀냄새와 무쓰냄새가 썩인 달착치근한 향기가 난다.

기댄 어깨가 통통하다. K는 자리밑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이 뜨겁다.

"네 손은 왜 이리 차니?" H가 말했지만 K는 대꾸없이

짧은 스커트 밑으로 드러난 그녀의 흰 무릎만 보고 있다.

잡고 있는 손에서는 끈적끈적한 땀이 솟는다.

H는 영화를 보는지 잠을 자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2


화면에서 전선위에 참새가 날아다니는지, 참새위를 전선이

날아다니는지 모르게 K는 계속 그녀의 무릎에만 시선을 둔다.

처음 신촌의 락까페 "스페이스"에서 만났을 때 H는 흰

블라우스에 초록색 바지를 입고 춤을 추고 있었다.

분홍색의 그녀의 운동화가 마루바닥을 마구 굴렸고 노란색

머리띠는 풀어져 이리저리 나풀대었었다. 그 다음 남영동의

원두커피집에서 만났을 때 그녀는 청색 스커트를 입고 보라색

티셔츠를 입었는데 K는 그녀의 치마밑으로 드러난 흰 종아리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왜 그래 부끄럽게" 그렇게 그녀가 말했다.

H는 작고 통통한 타입이었는데 K는 오직 그녀의 종아리만

기억속에 남는 것이었다.


K는 중학교를 서울 인근 시골에서 다녔는데 그곳에서는

자전거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여학생들은 체육복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다녔는데

그녀들의 짧은 다리가 자전거 발판을 기우뚱거리며

밟고 지나가는 모습을 K는 모자를 푹 눌러쓴 채

곁눈질로 열심히 훔쳐 보았다.

K는 등하교길에 괜히 남의 시선을 똑바로 보기 싫어서

늘 의기소침하게 어깨를 잔뜩 움추린 채 모자를 끝까지

눌러쓰고 땅만 보며 빠른 걸음으로 다녔다.

땅만 보며 걷다보니 다른 사람의 얼굴은 안보이고

그들의 다리부분만 보였다.


K는 앞사람의 종아리만 보며 졸졸 따라 길을 갔는데

특히나 흰종아리의 여학생들,그것도 상급생 여학생의 뒤만

쫓아 다녔다. 파란 실핏줄이 살위로 비쳐 보이는 종아리에

아침햇살이 반짝 빛날 때 K는 5살 때 죽은 엄마생각을 했다.

가늘고 짧은 종아리보다 길고 통통한 종아리를 K는 더

좋아했고 바람부는 날이면 K는 늘 목이 말랐다.

낙엽이 하나 둘 교정에 흩날리던 날 K는 담임선생과 면담을

위해 방과 후에 교무실로 불려 갔는데 그기서 그는 R을 처음

보았다. 

그녀는 수학 선생의 자리에서 무언가 열심히 쓰고 있었는데

K는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능글맞은 수학선생 자리에 그녀가

있다는 사실보다 그녀의 반달보양의 단발머리와 흰 칼라와

새하얀 목에 둔기로 머리를 맞은 듯한 아찔함에 잠시 멍하니

그자리에 서 있다가 담임선생의 고함소리에 다시 정신이 들었다

그녀가 잠시 돌아다 보았는데 긴 속눈썹 깊이 까만 눈동자가

물기에 젖어 그를 잠깐 스쳐 보았다.

그후, K는 R만은 똑바로 보지 못하는데다가 그녀의 종아리를

훔쳐본다는 불경스런 짓은 더더욱 생각을 못하고 그녀가

저만치서 오는 게 보이면 일부러 멀리 먼산을 보며 지나치거나

다른 길로 둘러 가곤 했다. 그러는 K의 심장은 심하게 뛰었다.


K는 3년동안 그녀와 말 한마디 변변이 못나눈채 졸업을 하고

이사를 하는 바람에 서울로 오게 되어 한동안 그녀를 보지 못한채

시간이 흘렀다. K가 R을 다시 만나 건 고1 겨울방학때였는데

방학이라서 시골의 할머니댁에 이주일 동안 놀러 와 있다가

다른 동창생들과 어울려 노는 자리에 R도 나타난 것이었다.

그녀는 예전보다 더 성숙되고 무언가 시골티가 벗겨진 듯한

모습이었는데 서슴없이 K에게 악수를 청하는 거였다.

떨리는 손으로 잡아본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은 형체가

없는 듯 부드러웠고 따뜻했다.




3



R은 잘 웃고 이야기도 잘하고 옆 친구에게 장난도 걸고 했는데

지켜보는 K는 질투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기 아닌 다른 친구들에게 그렇게 웃음을 주는 그녀의 행동이

K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줄곧 K는 말도 없이 자리만 지키며, 방바닥의 장판 무늬만

손으로 문지르며 가슴 속의 불만 달래고 있었다.

그녀는 시골 근처의 D시에서 여고를 다닌다고 했는데 K보고

자기 자취방에 놀러 오라고 했다.

K는 그녀가 괜히 의례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줄 알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좋아서 미칠 지경이었다.


서울로 돌아온 뒤에도 그녀의 환상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맨날

방구석에만 쳐박있는통에 , 다른 친구들에게 욕을 얻어 먹기도

했다. 



H가 손을 살며시 빼더니 손수건을 꺼내 닦고는 K 손의 땀도

닦아주고는 이번에는 팔짱을 끼고는 다시 머리를 기댄다.

뒤에서 영사기의 필름돌아 가는 소리가 차르륵 났다.



"아직도 날이 환하네""여름이니까 그렇지"

K는 극장간판을 비껴 쏟아지는 늦은 오후 햇살을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우리,어디 가서 시원한 것 좀 먹자""그래"

파고다공원 건너 햄버거집은 2층까지는 자리가 없어서

그들은 투덜거리며 3층까지 올라 가니 마침 창가쪽에

앉아있던 한팀이 막 자리를 떠나는 순간이었다.

"얘들은 왜이렇게 지저분하게 먹었냐?"

"내가 휴지로 좀 닦을테니 네가 내려가서 먹을 것 좀 사와"


K와 H는 팥빙수를 플라스틱 숫가락으로 섞으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건물앞 횡단보도로 한순간 사람들이 신호등

불빛따라 이쪽,저쪽으로 건너가고 차들이 지나가고

또 사람들이 건너가고 그 끝없는 반복을 둘이는 잠시 별 말없이 팥빙수를 먹으면서 내다보고 있었다.

"참 너 컴퓨터 샀다면서?"



모니터에 커서가 깜박인다.K는 마우스를 움직이면서

편지쓰기-이야기마당으로 찾아 들어갔다.


......■, 침묵은 눈동자에 물기를 증발시킨다.

두근거리지도 않는 막막함의 심연...


뚜, 안녕하세요.■ 띠,반갑습니다.

■ 지금 뭐하고 계시나요.

■ 잘려고 자리 펴놓고 비디오 보다가 기동시킨거예요.

■ 띠리,무슨 비디오 보셨어요?.

■ 일본 유학간 내 친구가 방학이라고 왔는데


걔가 일본 비디오를 몇 편 사와서 제가 빌린 겁니다......................................


■...닛뽄도 칼끝으로 침대 커버를 들어 올리며 낮게

그가 속삭인다.

$#@%$^&^*&^$#@!@#...


모니터 속의 전화선을 타고 저쪽 그녀는 꽃뱀의 또아리를 푼다.

모니터 가득한 신음의 단어들,

커서는 헐떡이며 전류를 흘린다.이런밤,넌 좋아하니?.

F1키를 눌러서 내가 보내는 그림을 윈도우에 띄워 놓고 봐.


에스컬레이트되는 청춘의 스페이스 바.



"어머,네가 웬일이니,여긴 어떻게 알고?"

"으응,다 아는 수가 있지""추울텐데 어서 들어와"

R의 미소는 언제나 눈부시다.

K는 그 겨울방학이 끝나기전 결국 R의 자취집을 물어물어

찾아가고야 말았다.

그녀의 작은 방안은 훈훈하고 따사로운 공기가 가득했고

그녀의 냄새인지 화장품냄새인지 좋은 향내가 감돌았다.

그녀는 재빨리 방안에 늘려져 있던 책이랑 옷가지를 한쪽으로

치우더니 작은 담요를 꺼내서 아랫목쪽으로 폈다.

"이리로 발이라도 넣어봐,여긴 따뜻할 꺼야."

K는 아랫목이 아니라 바람부는 언덕위라도 그녀와 함께라면

따뜻할것 같았지만 잠자코 담요밑으로 발을 넣었다.

"잠깐 있어,나갔다올테니"그녀는 작은 지갑을 챙겨 나갔다.

잠시 여닫힌 문사이로 잿빛 겨울하늘과 바람에 조금씩 흩날리는

눈발이 보였다.

K는 벽에 등을 기대고 방안을 둘러 보았다.

흰 천이 덮여있는 책상과 꽃무늬방석이 놓여져있는 의자,

작은 옷장하나,찬장하나.

방문 옆에는 작은 밥상이 덮개에 덮여 놓여져 있고 전기 밥솥이

 그 옆에 보였다.한쪽 벽에는 그녀 솜씨인지 학을 수놓은

액자가 천정 가까이 걸려 있다.



"심심했지 ?" R은 곧 돌아왔다."저녁 안 먹었지,

조금만 기다려 국만 끓이면 되니까. 배고플텐데

이거라도 먹고 있어"

그녀가 내미는 것은 따끈따끈한 호빵이었다.

그녀는 다시 밖으로 나가더니 수돗물에 무언가 씻는 소리랑

도마에 칼써는 소리,곤로 불 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유 손시려" 그녀는 다시 들어와 빨갛게 언 손을 담요밑으로

집어 넣었다."추운데 그냥 두지 그래,나 금방 가야돼"

"그래도 내방에 처음 왔는데 그냥 보내면 안되지"

R은 배시시 웃었다."서울은 어때 ?,여기는 좁아서 가볼만한데도

없고 참 심심해"

"학교하고 집만 왔다 갔다해서 나도 별로 가본데가 없어"

K는 R이 빤히 쳐다보는 바람에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리고

말해야 했다. 단 둘이,그녀와 단 둘이 이렇게 방안에 있다는게

참으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그녀의 향내랑 미소랑 모든 것이

그의 의식을 몽롱하게 만들며 말을 잊게 했다.

"너 여자친구는 안 사귀었니?,서울얘들은 모두 다 예쁘다던데"

'너 보다는 하나도 안이뻐'K는 이말을 꿀꺽 삼키며 "관심없어"

라고 말하고 말았다."내 친구 하나 소개시켜 줄까?,

착하고 예쁜 친구가 하나 있는데"

'나는 너 하나로 만족해'

"아냐,됐어."


K와 R은 같이 저녁을 먹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었지만

K는 그녀를 좋아 하고 있다는 마음을 하나도 표시 못하고 결국 서울로 떠나는 막차 시간에 임박해 있었다. "어머,벌써 시간이 저렇게

됐네" 그녀가 책상위의 탁상시계를 쳐다보며 말했을 때 K는 아쉬워서 마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가끔씩 이야기 나누는 가운데 담요 속의 K의 발이 그녀의 발과 닿고는 했는데 K는 맨발의 그녀의 발에 자기의 발이 닿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며 발을 멀리 떼어 놓았고, 그런 그가 재미있다는 듯이

그녀는 일부러 K의 곁에 바싹 붙어 앉아서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내가 바래다 줄께" "춥고 어두울 텐데,그냥 있어" "아냐 여기서 정류장이 가까워,그리고 2학년 올라가면 시간도 안나고 언제 또 보겠니"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책상 서랍중 제일 아랫칸을 열고 빨간 털양말을 꺼냈다. 그녀는 긴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무릎을 세우고 똘똘 말려 있던 양말을 푼 다음 한짝씩 신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K는

치마밑으로 드러난 그녀의 흰 종아리와 가늘고 긴 그녀의 발가락들을 보았다. 분홍색 발톱들은 단정하게 깍여 있었다. K는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고개를 돌려 딴 곳을 보는척 했는데, 그녀가 양말을 한쪽만 신고는 "내 발가락 참 못생겼지 ?"하며 발을 조금 들어 보이자 K는 도둑질하다가 들킨 듯이 "아, 아냐"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 깨끗하고 귀여운 그녀의 발가락들을 유리상자에 넣어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K는 먼저 일어섰다.서울로 가는 막차가 끊겼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면서. "이 옷 주머니좀 봐,참 크지. 네 손까지 넣어도 공간이 남아" R은 길을 가면서 K의 손을 잡아서

자기 코트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K는 그때 죽어도 좋다고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눈발이 듬성듬성 날리는 긴 골목길을 바람이 둘 사이를 가르며 갔다.




2. 가슴없는 빗줄기



K와 H가 햄버거집을 나왔을 때는 거리도 꽤 어두워져 있었다.

"우리집에 갈래?" H가 말했다. "너네 엄마, 아빠 계시잖아?"

"아빠는 출장중이시고 엄마는 동창회 가셨는데, 보통 동창회 가시면 11시 넘어서 오셔."

처음 K가 H네 집을 가게 되었을때도 H는 비슷한 말을 했었다.

기억은 안나지만 그날도 부모님 두분다 집에 안 계시다는 거였다. H네집은 아파트 5층이었는데 방이 네개나 되었고

베란다로 한강이 보였다. 작지만 아담하게 꾸며진 그녀의 방에서 그는 처음 그녀의 속살을 보았다. 헐렁한 티셔츠로 옷을 갈아입은 H는 K가 있음에도 자기 침대에 드러누워 침대를 출렁이며 K에게 말을 했는데 침대가 출렁일때마다 티셔츠 옷자락 사이로 맨살의 그녀의 몸이 들여다 보였다. K는 처음에는 당황하며 딴 곳을 봤는데, 숫제 그녀는 갑자기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앉아있는 K의 몸을 확 끌어안으며 말했다. "너 나 좋으니?" 그게 그들이 겨우 다섯번째인가 만났을 때였다.


H는 능숙하게 엘레베이터에서 나오자 현관키를 꺼내어 문을 열었다. "들어와" K는 널찍한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이거 마셔" H가 쥬스 두잔을 가지고 와서 하나를 내밀었다.

"사실 엄마도 오늘 안오셔. 파출부 아줌마가 계신데, 내가 오늘 쉬라고 했어"

K는 말이 없다. 그녀의 그 말은 안심하고 자고 가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K는 흥분으로 가슴이 떨렸다.



서울로 이사오고 나서부터 K의 아버지는 생활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집에 오지않는 날들이 많아졌고 집으로 젊은 여자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오곤 했다. K는 그런 아버지의 행동을 미워 하지는 않았지만 죽은 어머니 생각에 슬펐다. K의 생활도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식구들은 모두 서로에게 신경쓰지 않고 제각기 따로 놀았다. 누나도, 동생도. K의 집에는 식구들외에 일해주는 젊은 가정부가 한명 있었다. K의 누나보다 두어살쯤 더 나이가 들어보였는데 처음 K네집에 올때부터 껌을 짝짝 씹으며 반말을 했다.

어느날인가 K가 밤늦게 공부를 하다가 화장실을 가는데 그녀의 방문이 조금 열려있고 불빛이 새어나오는게 보였다.

K는 호기심으로 살짝 문을 조금 더 열고 들여다 보았더니 그녀가 잡지책을 보다 잠이들었는지 불을 켜 놓고 이불도 덮지 않은 채 자고 있었다. 그녀의 치마는 무릎위에서 말려있었고 남방도 단추 두어개가 풀어져 있었다. K는 침을 꼴깍 삼키며 숨죽여 보다가 그녀가 몸을 뒤척이자 놀라서 화장실가는 것도 잊고 방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후로 K는 밤마다 그녀의 방을 엿보았다. 불이 꺼져 있을때나 켜져 있을때나. ..



결국 그녀는 K가 고3 올라가던 해 봄에 다른 집으로 옮겨가고 K의 집에는 대신 늙수구레한 아줌마 한 분이 오셨다.



"나 담배 피워도 돼?" "너 전에는 담배 피우지 않았쟎아" "너 만날때만 안피워서 그렇지 피운지는 꽤돼" K는 그녀의 붉은 입술사이로 흰 치아가 금빛 담배필터를 물고 있는 걸 말없이 보았다.

하얀 담배 연기는 허공을 돌아 베란다 창문쪽으로 날아갔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렇게나 청순했던 그녀의 이미지는 허상이었던것인가. K는 그녀의 흰빛 종아리와 목덜미에 어려있는 그녀의 허무와

누구인지 모를 남자들의 웃음을 느꼈다. 세월은 여자들의 나이에 무엇을 빛바래게 하는 것인가.

그리고 세월의 흐름은 남자들의 숨어있어 억눌렸던 욕망을 햇빛아래 꺼집어내도 부끄럽지 않게 하는 것인가. "술 한잔 할래?" H가 일어서며 말했다. "진토닉 있어?"


밤은 그리고 어둠은 무엇을 빛의 뒷편에서 만들어 왔던가. 여자의 눈물과 남자의 한숨을 잉태하며 밤은 더 어두워진다. H의 희뿌연 등 너머로 벽에 붙어있는 큰 액자가 보인다. K는 그녀를 안으면서도 그 액자의 사진을 보았다. 거의 사진을 꽉 채운 그녀의 얼굴뒤로 바다가 있다.

희미한 스탠드 불빛으로 그 바다는 주황색으로 넘실거린다. 그녀는 파도를 타고 밀려온다. K의 가슴에서 잘게 부서지며 그의 몸 가득 저 수평선 너머너머의 해조의 슬픈 울음소리를 토해 내었다. 그녀는 파도의 끝에서 무슨 생각이 스쳤던 것인지 감은 눈가에 눈물 한방울 어린다. '너 나하고 졸업하면 결혼할꺼니?'갑작스런 그녀의 물음이 K의 더운 숨결을 막는다. '겁내지마 난 결혼같은 것 안해. 일평생을 남자를 위해 저당잡히고 싶지 않아' 그러나 그녀는 말없는 K의 얼굴을 보며 우울한 낯빛을 한다. '내일 비온데, 비오는 날 죽으면 멋있겠지. 빨간 장미나무들 속에서 나도 빨간 피를 흘리며 조용히 시드는 거야.' '너 오늘 좀 이상하다. 다른 때 하고 틀려' '미안해...,아침에 내가 밥 해줄께'


다음날 돌아오는 K의 발걸음은 왠지 무거웠다. 그녀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것인가...



3.돌아오지 않는 후조


R을 다시 만난것은 언제였던가. K는 강의가 빈 시간에 본관건물 앞 벤치에 앉아 하늘을 보았다.

벌써 여러날째 H는 소식이 없다. K는 궁금했으나 전화해보지 못했다. 그녀가 혼자있고 싶을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K가 그럭저럭 전기대학에 간신히 합격하고 R은 후기여대로 진학했다. 그는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R을 만나볼려고 했으나 그녀는 피하기만 했다. 그녀가 시집간 언니집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알았

으나 그녀의 언니는 그녀의 부탁을 받았는지 잘 안바꿔주려 했다. K가 다른 사람을 통해 그녀와 통화를 하려 했을 때도 그녀는 바쁘다던지 어디 약속이 있어 나가봐야 된다면서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리곤 했다. K는 화가 났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의 갑작스런 변화가 무엇때문인지,만나보지 못한 세월 동안 무슨일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으니. 단지 그의 기억속에는 그 겨울의 그녀의 흰 얼굴만 남아 있을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흘러갔고 계절이 바뀌었다. 대학 들어오면서 사귄 새 친구들은 다들 부유한 집안으로 놀기 좋아했고 앞날에 대한 아무런 걱정도 생각도 없이 살아가려 했다. K도 그들 속으로 묻혀 들어갔고 남들이 시국이나 인생관으로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을 비웃으며 생활했다. 그러다 보니 R에 대한 간절함도 열망들도 빛바래져 갔다.


어느날인가 K가 친구들과 신촌의 호프집에서 노닥거리고 있는데 R이 왠 남자와 같이 들어오는것이 눈에 띄었다. R을 보게된 반가움보다도 깊은 질투심이 먼저 솟았다. 그는 일부러 그들 자리로 가서

아는체를 하였다. "여, 이거 오랫만인데, 너 굉장히 섹시해졌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술기운 가득한 얼굴과 불량기 있는 몸짓을 쳐다 보았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당황함과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며 그녀와 그를 쳐다 보았다. "너 왜 이래 불량스럽게" "내가 뭐 어쨌는데,난 단지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다는 것 뿐이야." "알았으니까 네 자리로 돌아가." "그래 가라면 가겠는데 이 촌놈이 아는체해서 창피하다이거구만. 잘들 해 보라구" 그는 자리로 돌아왔다. 그녀와 그 남자는 주문도 안하고 횡하니 나가 버렸다.


"야, 누구냐 쟤들?" "응 중학교 동기인데 한때 내가 좋아했었지" K는 어깨를 어쓱이며 말했다.

"야 그러면 딴남자랑 놀아나는 걸 그냥두냐" "할 수 없지 뭐 어떡하냐" "야 우리가 그 자식 혼내주자"

"야 그러지마" "넌 가만히 있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가 미처 말릴사이도 없이 그의 친구들은 밖으로 우루루 몰려 나갔다. 시간이 많이 늦은 거리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그녀와 남자는 호프집 바로 앞에서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K의 친구들이 그들을 둘러 섰고 몇마디 말이 오간 후 그녀의 비명소리와 함께 주먹이 오고 갔다. 그 남자는 반항을 했으나 중과부족으로 곧 일방적으로 맞기 시작했다. K는 그 남자가 맞는데 대한 후련함보다도 그녀가 그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모습에 더 질투심이 솟았다.

"야 그만 가자." K는 먼저 그 거리를 빠져 나왔다. 그들은 다른 술집으로 몰려 가서 좀전의 일에 대해 떠들고 웃고 하였으나 K는 마음이 언짢아서 묵묵히 술만 마셨다. 묘한 그녀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며. '다 소용없어 나도 너처럼 되는데로 여자 만나며 살면 그만이지 뭐.'



하늘에 구름이 하얗다. 하늘엔 가을이 가득해 있는것 같다. K는 생각에서 벗어나 한숨을 후 쉬었다. 세상엔 여자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여자마다 모두 다르다. K도 다른 여자를 집으로 데려간 적이

있다. 미팅해서 만난 M이라는 여자였는데 K는 그저그런 마음이었는데 그녀는 그를 마음에 들어했다.

둘은 가끔 만나서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그녀가 불쑥 "너네 집에 놀러가도 돼니"

라고 그에게 물어 보았다. "왜?" "난 남자들이 어떻게 해놓고 사는지 궁금했거던" "별거 없어" "그래도 가보고 싶어" "아무도 없는 방에서 내가 무슨짓을 하면 어쩔래?" "너보다 내가 힘이 셀껄"그녀는 웃으며 주먹을 들어 보였다.





M을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그날 K의 집을 같이 온 후로 K는 그녀에게 질려버려 더이상 그녀에게 아무런 이성으로서의 신선감을 잃어버렸다. 마침 아무도 없는 집을 자기집처럼 이방 저방 기웃거리더니 숫제 K의 방에 들어서서는 온방을 헤집어 놓는 것이었다. 마치 자기가 이집식구라도 된 듯이.

그리고 K의 앨범을 펴보며 낯선 여자의 사진이 나올 때마다 누군인지 어떤 관계인지 꼬치꼬치 캐묻는데에는 K를 질색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라면을 끓여 먹는데 자기는 자취하는 선배들이나

동기들 집에 가면은 라면을 너무 잘 끓여 먹여서 방주인들이 마누라삼고싶어 한다는 자랑을 하고는 라면이라는 것을 끓여 내었는데 K는 평생 그처럼 맛없는 라면을 먹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면발은

설익어서 꼬들꼬들했고 국물은 파나 김치,달걀따위가 많이 들어갔음에도 물을 너무 많이 잡아서 싱겁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K는 별 내색없이 먹어주고 있는데 맛있지 어쩌지 하면서 라면국물을

자기 옷에 흘렸고 애교부린다고 라면 꼬리를 입가에 한바퀴씩 돌리며 먹는 모습은 정말 목불인견 이었다. 그러나 그건 약과였다. 라면을 먹고나서 설겆이를 하거나 커피라도 마셔야 했을텐데 그릇들을 씽크대에 쏟아 놓고나서는 K가 내온 과일을 먹는둥 마는둥 하고는 둘이만 있으니 기분이 이상하네 어쩌네 하면서 K의 옆에 바싹 붙어서는 제딴에는 분위기를 잡는다고 하는데 K는 그녀의 입가에

채 가시지 않은 라면 냄새와 김치냄새 그리고 언제 그새 화장을 고쳤는지 빨간 입술이 눈앞에 코밑에 아른거리자 K는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허허 웃어줄 뿐이었다.

너란 여자는 대학이라는 껍데기를 걸치고 잘난체 거들먹거리겠지만 시장바닥에 주저앉아 지저분한 음식들을 파는 아줌마보다도 더

여자스럽지 못해. 그러나 K는 그녀의 얼굴을 요령껏 피하면서 그녀의 몸을 안아주었다. 이외로 그녀의 몸매는 훌륭했다. 쯧 교양이 없어서 탈이지 갖출것은 다 갖추었구만. 그녀는 눈을 감고 몸을

바르르 떨었는데 그건 그녀가 별로 남자 경험이 없다는 증거였다. 입으로는 모든 걸 다 도통한 듯 떠들어대지만 그것은 자신의 경험부족을 감추기 위한 과장된 표시였을 뿐이었다.


둘이는 얼마후 대문을 나섰다. 그녀는 정류장까지라도 바래다주기를 원하는듯 했지만 K가 전혀 그럴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이따 전화해 하면서 바삐 골목길을 뛰어 갔다. 휴 K는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이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애정도 없이 그저 무엇때문에 아무 여자나 집안에 불러들이고 그리고 안아주는 것인가. 그건 K의 마음속의 무엇인지 모를 공허와 외로움 때문인 줄을 그때는 몰랐었다.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H였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니. 너 요새 잘나간다면서. K는 가슴이 뜨금했다. 뭐가. 벌써 나한테는 싫증났나보지, 다른 여자를 만나고. 아냐 만나긴 누구를

만나. 거짓말하지마 네 목소리가 다 말해주고 있는걸. K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어디엔가 숨어서 지켜본 걸까. 아니면 그냥 넘겨집는 것일까. 괜찮아 다른 여자 만나면 어떠냐 나도 다른

남자들 만나는데 뭘.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런데 이상하다 그래도 네가 다른 여자 만나는 것은 싫다


내가 네 마누라도 아닌데 말야 호호. 그녀의 웃음은 메마르다. K가 더이상 말이 없자 그녀도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K는 미안스러움에 겹쳐 짜증이 솟았다. 그녀의 질투가 자기를 좋아하기 때문이겠지만

그는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그녀에 대해 짜증이 났던 것이다.

다시 H에게서 전화가 왔다. 미안해... 그녀는 울고 있었다. 너 왜그러니 무슨일이 있었니. 몰라. 가을 탓인가봐. 요즘 집에 들어오기가 싫더라,식구들 모두 낯설고,그리고 이렇게 사는게 싫어졌어,

갑자기 나도 어른이 되었나봐. 그녀는 한숨처럼 길게 말을 늘이면서 울먹이면서 말을 계속했다. 나 사실 그동안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여러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그랬지만 정작 마음속으로 좋아해서 만난 아이는 없었어,그리고 그렇게 지내오면서도 어느 남자와도 자 본적이 없었어. 그런 내가 너에게 안겼던 것은 너를 너만을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이고 나도 이제 한남자만 만나면서 한 남자만 바라보면서 살고 싶어져서 그래. 내가 마치 독신으로 살듯이 날라리처럼 너에게 얘기했던 것은 너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 그랬던건데,근데 막상 너와의 육체적인 그 하루밤과 그 뒤에 이어진 시간들이 나에게 견딜 수없는 무게로 짓누르기 시작해서 힘들고 괴롭고 또 외로워. 이제 내가 너 하나만을 선택했듯이 너도 나하나만 만나면 안되겠니 ?. 그녀의 목소리가 자꾸 작아진다. K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녀처럼 이런저런 깊은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고 그런 생각들을 한다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저 바람부는데로 살고 싶었고 누구에게도 매이기 싫었던 것인데. R때문이 었을까. 그의 천성때문일까. K가 별 말이 없이 수화기로 숨소리만 불어 넣자 그녀는 다시 미안해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4.사랑의 지옥과 이별



우리 요즈음 들어 만난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그때 그 전화 이후로 너 나를 피하는 것 같다. 우리는 무엇때문에 그토록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니. 우리가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면. 그리고 너에게 모든 것 쏟아부운 나는 뭐냐. 왜 마음이 변했니.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대로인데.

나를 몰아세우지마. 나 별로 깊은 생각없이 사는 놈이야. 그리고 그 순간의 감정에 충실했을 뿐 마음이 변했다느니 하고 나를 그렇게 나쁜 놈 취급하지마.

그럼 난 뭐야 난 도대체 뭐냐고. 왜 책임을 회피하려 들어.난 네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다. 그래, 그럼 이런 놈인 줄 알았으니까 이제 네 마음대로 해.




K는 모든게 지긋지긋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와 좋은 아름다운 따사로운 시간들을 보냈었으나 이제 그녀의 얼굴을 보면 짜증만 난다. 그녀는 왜 요즈음 여자같지 않은 걸까. 좋았을 땐 좋았던 거고 싫어졌으면 싫어진것 뿐이지 구질구질하게 매달리고 그럴까. 마음이 답답하고 울적했다.

착한 그녀에게 이렇게 밖에 대해주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도 짜증이 났다. 어떻게 하란말인가. 날들이 흘러가자 그녀의 전화도 없고 학교에서도 통 보이질 않았다. K는 다소 마음이 놓이기는 했으나 그녀가 어디가서 덜컥 죽어버릴까 싶어서 겁도 났다. 그러던 중 한학기가 흘렀다. 조금씩 그녀의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K가 가장 싫어했던 K의 고등학교 동기들과 그녀가 어울린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K는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 무슨 짓거리를 하려는걸까. 일부러 K가 기분나빠할 일을 해서 그에게 복수하려는 걸까. 아니면 K의 마음을 돌리려는걸까. 그녀에게서 좋지 않은 소문이 늦가을 낙옆쌓이듯 쌓일수록 그녀에 대한 K의 마음은 더욱 싸늘해지기만 시작했다.

그녀에게 남았던 일말의 죄스러움이나 연민같은 감정들 대신에 조금씩 증오감만 부글부글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가끔식 그녀가 그 패거리들과 히히덕거리며 지나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그에게 남모르는 싸늘한 미소를 던지고는 휙 지나가 버렸다.


그녀와의 좋았던 시간속의 그녀는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그녀와의 사랑인지 뭔지 그것이 그녀와 함께하는 밤이 많아질수록 권태로와졌고 그것이 K가 다른 여자를 찾는 핑계가 되었지만 영화속의 이야기인줄만 알았던 것이 눈앞에 이렇게 펼쳐지다니. 미저리,비터문...사랑의 길 옆에는 지옥의 낭떠러지가 있다는 걸 왜 몰랐을까. 영화의 자막처럼 K의 상념을 파고드는 우울한 환상. 학교를 쉴까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런다고 해결이 날 것같지도 않았다. 며칠을 밤새워 끙끙거리던 K는 그 패거리중의 한 놈에게 전화를 해서 학교근처의 술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들은 기다리기 라도 했다는듯이 좋다고 했다. 평소 집안 형편이 넉넉했던 K를 그들은 은근히 시기하고 있었고

K를 벌레보듯 싫어했기에 마침내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나보다.


술집은 시끄러웠다. 그들은 구석의 칸막이 안으로 들어갔다. 얼굴이 미끌미끌하게 생긴 G라는 놈이 능글맞게 웃었다. 너희들 H만나지마.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냐, 네가 H의 기둥서방이라도 되냐,말들어보니 네가 H를 찼다면서 남이 버린여자 우리가 주워서 놀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H는 착하고 좋은 아이야 너희들과는 어울려서는 안되는 얘야. 오라 그러니까 우리처럼 인간같지도 않은 놈은 여자사귈 가치도 없다는거냐. 말 함부로 하지마. 뭐야 새끼야 너같이 돈푼이나 있는 놈 들은 여자까지도 돈으로 사며 마음먹은데로 여자를 바꾸고 노는 지는 몰라도 우리같은 껍데기들은 그러지 못해, 품안으로 찾아든 여자를 왜 포기하냐. 너희들 계속 H만나면 그냥두지 않을꺼야.

허허 그래 맘데로 해봐 이새끼야. K가 뭐라고 다시 말하려는 순간 K의 안경낀 얼굴위로 술잔이 날아들었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깜깜했다. 그 순간은 몇 초, 몇 분이 지났을까. K는 더듬거리며 안경을

찾았다. 안경은 한쪽 렌즈가 완전히 박살이 났고 K의 오른쪽 뺨위로 찝찔한 액체가 흘렀다. 이 새끼가. K가 눈앞에 보이는 술병을 들려는 찰나 G의 주먹이 다시 그의 얼굴을 쳤다.

그리고는 진짜 완전한 밤이었다. 완전한...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찬 늦가을 밤공기가 흐르는 하늘엔 보일락말락 별 몇개 반짝인다. K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개천가 낡은 나무의자에 무너지듯 앉았다. 눈가로 자기도 모르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왜 무엇때문에 우리는 여기까지 와야만했는가. H의 얼굴이 가지만 남은 나무가지에 걸리듯 어른거린다. 슬프다. 젊음은 ...


희미한 반달모양의 형광등이 누렇게 바랜 천정벽지 한가운데 덩그러니 걸려있다. 침대옆 작은 창문에는 바깥공기가 차가운지 뿌옇게 김이 서려있고 무슨 냄새인지 모를 퀴퀴한 냄새가 방 가득 흘러다녔다. K는 술냄새 가득한 한숨을 허공에 뿌리며 침대에 사지를 펴고 누웠다. 여기 지금 이 자리에 누워있는 나는 과연 나인가. H와의 따뜻했던 순간들이 불현듯 생각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화장실쪽에서 물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K는 비로소 자기가 혼자만 여기에 있는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나도 미쳤지... K는 쓰게 웃었다. 욕실문이 열리면서 그 여자가 타올로 몸을 휘감고 나타났다. "자기도 샤워해." 친구와 술마시다가 헤어져 술취한채 어느 낯선 거리까지 걸어왔던 기억과 누군가 팔짱을 껴오던 생각이 났다. 그 거리는 쇼윈도우 진열장속을 하얗게 얼굴을 화장으로 짙게 감춘 여자들이 누구는 무표정하게 누구는 웃음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끌고 그 진열장 속으로 사라지며 돈을 버는 그런 곳이었는데 K는 자기를 내팽개치듯 그 속으로 휩쓸려 갔던 것이다. 잠시의 쾌락을 찾고자 했던 것도 아니고 절실한 다른 이유가 있어서도 아니고 단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술취한 발걸음이 가는데로 왔지만 마음에 슬픔이 흘러내리는 듯한 허무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다.

욕실 거울에 꺼칠해진 얼굴을 비춰보며 K는 또 씁스름하게 웃었다. 웃는 일 외에 지금 이상황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샤워를 하는둥 마는둥 K는 욕실을 나왔다. 몸은 술과 피곤에 지쳐 물먹은 솜처럼

늘어졌지만 의식만은 점차 명료해지고 있었다. 그녀가 그를 보며 웃었다. 왜 속옷은 입고 나오냐고 하면서 "술 한잔 더 할래?" 그에게 묻고는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 탁자옆의 작은 냉장고문을 열고

맥주병을 꺼내 들었다. 둘이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술잔을 들었다. 그도 그녀도 거의 벗은 채로.

"이런데는 처음이야?" K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와 자는 건 처음이 아니지?" K는 대답대신 슬며시 웃어 주었다. 불빛이 어둡고 그녀의 화장은 짙었으므로 그녀의 얼굴이 어던지 분간하기가 힘들었지만

그게 무슨 대수냐하면서 K는 술잔을 단숨에 비워 버렸다. "어려 보이는데 나보다도 나이가 어린 건 아니지?" K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자 "군대는 다녀왔어?" 다시 물었다. "응" "그럼 안심이다, 이

장사하고 있지만 나이어린 동생같은 얘들을 상대하기는 싫거던. 그것도 순 숫총각이면 더욱더"

그녀의 동그란 어깨에는 우두맞은 흉터가 나있다. 그녀도 어릴적 어머니가 데리고 다니며 예방주사도 맞히고 시장도 보고 했겠지. 그 흉터로 인해 그녀가 조금은 인간적으로 보인다. "담배있어?" K가 고개를 젖자 "아참, 핸드백속에 몇가치 있을텐데." 그녀는 빨간 핸드백속에서 기다란 양담배 한개피를 꺼내어 입에 물고 조금 피우더니 재떨이에 꾹 눌러끄고는 "그만 잘까?" 하며 형광등 스위치를 내렸다. 창을 통해서 바깥의 불빛들이 비치고 있었으므로 방은 그다지 어둡지는 않았으나 K의 마음은 암흑처럼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이건 단지 유희도 아니고 좌절의 배설일 뿐이야.'


그녀는 다시 담배를 피워 물더니 K의 입에 물려주었다. "원래 교통비는 따로 받는거지만 처음 온 사람에게는 안받거던" 그녀는 욕실에 갔다오더니 그의 뺨을 가볍게 두드려 주고는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누워서 어둠속에 실루엣처럼 그녀가 옷입는 모습을 지켜보며 K는 그녀의 등가득 어려있는 어떤 고독을 느꼈다. 사춘기 이후 되는데로 여자를 만나고 사랑을 하고 헤어지고 했던 그였지만 H와 R에게서 깊은 상처를 받은 이후 여자에 대한 생각들이 삐뚤어져 가던차에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또다른 감정은 K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문을 조용히 닫고 사라진 후 K는 갑자기 온 전신을 감싸오는 회한스러운 외로움에 침대에 엎드려 화살맞은 짐승처럼 어르릉거리며 울었다.

무엇일까 산다는 것은.


"이런데 자꾸오면 안돼, 다음부터는 오지마, 나 돈 안벌어도 좋으니까" K가 얼마뒤 다시 찾아가 그녀와 전번의 그 여관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슬픈 눈동자로 말했다. K는 아무런 대꾸없이 이번에는 먼저 술병을 꺼내 들었다. "난 나이들어 늙는게 두려워, 아마 다른 얘들도 같은 심정일꺼야. 이 바닥에서 뒹굴다가 영 다른데로 가지 못하고 나이든 언니들 보면은 다그렇고 그런 신세로 너무 비참해져 있거던" "그럼 그만두면 될거아냐?" "네가 돈벌어줄래?" 피식 웃으며 그녀는 K의 등을 쳤다.

비가 내리는지 창문에 후두둑하는 소리가 났다. 이렇게 겨울은 오는가 우리들의 겨울은...K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녀가 노래를 불렀다. 나즈막한 목소리로. "오늘도 네온불 꺼져가는 거리를

립스틱 마스카라 짙게 바르고 걸어가는 ..."



5.겨울새


R을 다시 만난 건 고향친구의 결혼식에서 였다. 신랑 신부 모두다 중학교 동기였으므로 그녀도 그기에 온 모양이다. 그녀가 결혼을 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그 이후로 얼굴을 보게 된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많이 성숙해보이다 못해 이제는 나이든 티가 났다. 식장 구석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K를 알아보고는 그녀가 먼저 다가왔다. "오랜만이야" K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미안해"

"괜찮아 다 지나간 일인걸, 그때 그 남자와는 헤어졌어" "그럼 누구와?..." "맞선보고 만난 사람이야 너보다 못생겼어 나이도 많고" 그녀는 웃음만큼은 예날 그대로이다. 이젠 화장이 잘 어울리는 R의

빨간 입술과 흰 치아를 보며 K는 그리움이 다시 밀려오는걸 느꼈다. "잘 살고 있니?" "그럼..."

그들은 식단위의 신랑 신부를 쳐다보며 입을 다물었다. 두사람 사이에는 침묵보다 더 깊고 깊은 골짜기가 가로 놓여 있음을 서로 잘 알고 있었기에. "어디가서 술한잔 할 시간있니?"그녀가 먼저 제의했다.


예식장이 D대학교 옆에 있었기에 그들은 식이 끝난 다음 천천히 D대학교 정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학교 기말시험이 끝날 때쯤이고 또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거리는 한적했고 영업을 하는 집도 드물었다. "우리 저기로 갈가?" 그녀가 조금 떨어진 2층집을 가리켰다.


그 까페는 개업한지 얼마되지 않았는지 내부가 깔끔하고 분위기도 밝고 환했다.그들은 구석자리에 앉았다. 차가 나오고도 얼마동안 그들은 커피잔만 두손으로 감싼 채 말이 없었다."졸업하면 뭐 할꺼니?"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글쎄,아직 잘 모르겠어.""넌 시집가서 재미있니?

남편이 잘 해줘?" 그녀는 커피를 한모금 마시더니 "졸업하고 너무 일찍 결혼한 것 같아서 조금 후회되기는 한데 그럭저럭 잘살고 있어.사실 남들처럼 결혼에 대한 환상같은 것은 없었거던"

그녀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넌 애인 없니?,이제 졸업하고 취직하고 그러면 결혼도 해야할 꺼 아니니?" K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아직 잘 모르겠어""넌 잘 모르는

것 투성이구나"그녀가 긴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글쎄 그것도 잘 모르겠어"

그들은 웃었다.K는 조금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많이미워했지,아냐,너한테잘못대해줘서사실나도그동안많이미안했어,괜찮아이젠내잘못이더 많은걸내가내감정만앞세워네마음을전혀헤아리지못했던거고주제넘게너를좋아했던죄지,넌좋은남자

같은데내가사랑하고좋아할타입은아니었었어그리고너에비해여러가지모자라는부분도많았고,내가뭐 잘났다고...


둘이는 마음이 평화로와지는 기분으로 옛날 이야기를 이어갔다."우리 술 한잔 할까"그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그녀의 그 웃음은 몇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옛날의 그 눈부셨던 모습이 남아있다."아직 한낮인데?" "뭐 어때, 눈도 올것 같고 기분도 좋고 옛날로 돌아간 기분으로 마셔보지 뭐, 오늘 남편한테 허락 받았어 옛날 애인 만나서 늦을 꺼라고 그랬지" "그런 얘기까지 해도 돼니?""그런 말해도 믿지도 않아 워낙 나를 신뢰해서 그런지,그리고 남편도 오늘 무슨 약속이 있어서 늦는다고 그랬거던,나이차가 많이 나서 그런지 나를 많이 생각해 주는 편이야" "좋아 우리 한번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보자"


그들은 술을 시켜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잔을 권커니 잦커니 했다.그녀는 오랜만에 총각하고 마시니 술맛이 난다고 농담을 했고 그는 유부녀하고 바람피우다가 장가도 못가고 신세 망치는 것 아니냐고 맞받았다.그 까페에서 그들이 거나하게 취해서 밖으로 나왔을 때 짧은 겨울해는 저물어 어둑해진 거리에 간판 불빛이 휘황했다."이것 봐 눈와" 그녀가 소녀처럼 들뜬 목소리로 하늘을 올려다 보며 외쳤다.술기운과 찬공기에 밝그레해진 얼굴로 네온사인 불빛에 비춰보이는 그녀의 얼굴에 K는 불현듯 잊었던 그녀에의 그리움이 물밀듯 밀려 오는 것을 느꼈다.K는 침을 한번 삼키고 숨을 크게 쉰 다음 그녀의 시선을 따라 같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눈발이 금방 굵어져 삽시간에 주위는 흰 눈송이로 가득했다."야 정말좋다.우리 눈오는 거리를 마음껏 걸어 볼래?""OK"그도 그녀도 들뜬 목소리로 말하고는 D대학 담장을 따라 걸었다.야 총각 나 취하는

데 어깨동무 좀해도 돼냐,아이구 아주머님 영광입니다.눈이 내리네 외로워지는 마음에 눈이 내리네 그대떠난 길목에...한팔로는 그의 어깨에 두르고 한손은 그의 팔을 잡은채 그녀가 나즈막히 노래

했다.하얀 눈을 맞으며 님이 떠난 그길을 나도 걸어 가보네.K는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며 따라서 크게 불렀다.야너우냐사내자식이,울기는눈이녹은거야,유행가가사같은소리말고너절한추억

따위는던져버리고잘살아봐,그래...


나이가 들면은 마음이 넓어지는 걸까.아니면 세속에 시달려 무심해져서 그런걸까.결국 그와 그녀는 인생의 동반자는 되지 못했지만 좀더 성숙된 모습으로 서로에게 따뜻한 손길 건넬수 있게

되었으니...


K는 이제 고립되고 편협되던 학창시절을 마감하고 한 사회인으로서 새로운 갈등과 도전과 희망과 좌절이 기다리는 기성의 문 안으로 들어서 간다. 사람과 사람의 물결에서 짧은 인생에 욕되지 않는

사람이 되자고 K는 다짐을 하며 취업원서를 들고 집을 힘있게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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